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사황후 하씨 (문단 편집) == 정사 == 키는 일곱 자 한 치(약 168cm)로 당시 기준으로 남자와 비슷한 장신이었다.[* 현대 기준으로도 여자 치고는 꽤나 장신이다. 현대 중국과 홍콩 여성 평균 키가 158 cm이고 대만이 159 cm이다. 참고로 남성 평균 키 역시 중국이 169 cm, 홍콩이랑 대만이 171 cm이다. 현대 한족들 키랑 비교해 봐도 여성 평균 키보다 10 cm 가량 크고 남성 평균 키보다 조금 작은 것이다. '''고대 여성이 말이다.'''] 백정 집안이었지만 조정에서 가구 조사를 나왔을 때 집안 사람들이 뇌물을 써서 하진의 여동생 하씨를 영제의 [[후궁]]으로 들이게 했다.[* 출처: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주석《풍속통》] 하씨는 영제의 아들 [[후소제(후한)|유변]]을 낳고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기가 세고 질투가 심했기 때문에 후궁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178년, 영제가 황후 송씨를 폐했다.[* 출처: 《후한서》 <영제송황후전>] 180년, 하씨는 후궁에서 황후로 신분이 상승했다. 하씨가 황후로 책봉될 당시 [[고제(전한)|한고조]], [[광무제]]에게 제사를 치루지 못했기에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하씨가 황후가 되자 하황후의 가족들도 덩달아서 관직이 상승했다. >예전에 하황후가 새로 책봉되었을 때, 마땅히 이조(二祖)의 묘당에 아뢰려고 재계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변고가 생겼다. 이와 같이 하기를 몇 번이나 했으나 끝내 이를 치르지 못했다. >당시에 뜻있는 선비들이 마음속으로 이를 괴이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끝내 하씨로 인하여 한나라 황실이 기울어 몰락하고 말았다. >----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하황후는 영제의 후궁 [[영회황후 왕씨|왕미인]]이 임신을 하자 약을 먹여 낙태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1년, 왕영은 유협[* 후일의 [[헌제]]]를 낳았고, 하황후는 결국 왕영을 독살했다. 영제는 화를 내며 하씨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하려고 했지만 환관들이 말려서 가까스로 넘어갔다. 어머니를 잃은 유협은 할머니인 [[효인황후 동씨|동태후]]가 길렀다. 동태후가 아들 영제에게 유협을 태자로 삼으라고 자꾸 권하자 하황후는 이를 한스러워했다.[* 출처: 《후한서》 <효인동황후전>] 영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하자 하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소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했다. 동태후의 조카 [[동중]]과 하태후의 오빠 하진은 권력을 다투었다. 하태후는 시어머니 동태후를 정적으로 간주하여 낙양에서 추방하고 유살했다. >동태후가 정사에 참여하고자 할 때마다 번번이 하태후가 이를 금지했다. 이에 동태후가 화를 내면서 꾸짖어 말했다. >"네가 지금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것은 네 오라비를 믿고 그러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표기장군(동중)에게 칙서를 내려 하진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할 수 있노라." >하태후가 듣고서 그 일을 하진에게 알렸다. 하진이 삼공 및 동생 거기장군 하묘 등과 함께 상주하여 말했다. >"(중략) 청컨대 영락후를 궁에서 옮겨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하태후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에 하진이 군대를 일으켜 표기장군부(驃騎將軍府)를 둘러싸고 동중을 사로잡아 관직을 박탈하니 동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태후가 근심과 두려움 끝에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했다. (중략) 백성들은 모든 허물을 하씨에게 돌렸다. >---- >《후한서》 <효인동황후전> 십상시가 내세웠던 동태후가 죽자 하진은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환관들을 죽이려고 했다. 한편 하태후의 여동생은 십상시 [[장양(환관)|장양]]의 며느리였다. 환관들이 무양군과 하묘에게 뇌물을 바치자 하태후는 하진이 환관들을 죽이려하는 것을 반대했다.[* 출처: 《후한서》 <하진열전>] [[하진(삼국지)|하진]]의 [[우유부단]]과 마찬가지로 하태후도 이후 참변의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 189년, [[십상시의 난]]에서 [[십상시]]는 하태후의 조서라고 속여 [[하진(삼국지)|하진]]을 '''궁궐로 불러들여서 죽여버린다.''' 분노한 [[원소(삼국지)|원소]], [[원술]], [[조조]], [[오광(삼국지)|오광]]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환관들을 학살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하진의 의붓동생인 [[하묘]]도 하진의 부하였던 [[오광(삼국지)|오광]]에게[* 오광은 평소에 환관들과 가깝게 지내며 하진에게 [[환관]]들과 화해하라고 권하는 하묘를 의심했다.] 형인 하진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장양(환관)|장양]]은 소제와 하태후 그리고 [[헌제|진류왕]] 등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때 [[노식]]도 싸울 준비를 갖춘 채 원소측에 합류해 있었는데, [[십상시]]의 일원인 [[단규]]가 하태후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창(무기)|창]]을 쥔 채 단규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그 기세에 눌린 단규가 태후를 놔두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태후와 별도로 소제와 진류왕은 장양에게 이끌려 궁궐을 탈출했다. >장양 등이 들어가 태후에게 아뢰기를 대장군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을 불태우고 상서(尙書)의 문을 공격하고 있다하고, 하태후와 천자와 진류왕을 대동하고, 또 궁궐 안의 관속들을 겁박하여 복도(複道)를 따라 북궁(北宮)으로 달아났다. 상서 노식이 각도(閣道)의 창문 아래에서 과(戈)를 잡고서는 [[단규]](段珪)를 올려다보며 (그들의 죄를) 늘어놓았다. 단규(段珪) 등이 두려워 태후를 놓아주었다. 태후는 각(閣) 아래로 뛰어내려 (난을) 면하였다. >---- >《후한서》 <하진열전> 황제 소제와 진류왕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고 정권을 잡자 소제를 폐위해 홍농왕으로 강등시키고, 진류왕 유협을 황제로 옹립했다. >병주목 동탁이 부름을 받아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낙양에 들어와 조정을 능멸하고 억압했다. 동탁이 끝내 소제를 폐하여 홍농왕으로 삼고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헌제(獻帝)다. 홍농왕이 부축을 받은 채 전각 아래에서 북면하여 신하를 칭했다. 황태후가 흐느껴 울고, 뭇 신하들이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으나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또한 동탁은 하태후가 시어머니 동태후를 죽인 것을 문책하며 유폐시키고 독살했다. >동탁은 황태후가 영락태후(永樂太后)를 핍박해서 근심해 죽도록 만들었으므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예를 거슬렀다는 의문을 올렸다. 이에 황태후를 영안궁으로 옮기고 [[짐새|짐독]]을 보내 시해했다. 황후에 오른 지 10년 만이었다. 동탁이 황제로 하여금 봉상정(奉常亭)에 나가서 애도하게 하고, 공경들에게는 모두 흰 옷을 입고 조회하게 했지만, 끝내 상을 치러 주지 않았다. >----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하태후는 영제의 무덤인 문소릉에 합장되었지만 동탁이 하태후의 장례 도중 문소릉을 파헤쳐서 부장품들을 도굴했다.[* 출처: 《후한서》 <동탁열전>] 이듬해 아들인 소제도 독살당했다. 하태후는 영사황후(靈思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